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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정신의 蘭(난)

기사입력 2021.03.25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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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김없이 봄은 찾아와 난향이 가득하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올해는 여느 해와는 달리 꽃샘추위도 없이 날씨도 어깨동무처럼 포근하다. 추위가 한창 맹위를 떨치는 겨울의 정점을 지나자말자 철모르고 피어난 꽃 이야기를 두고 잠시 어리둥절한 마음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대자연의 흐름을 누가 알기나 할까?
     

    바야흐로 난초의 향기가 매혹적인 계절이다.
     

    난은 입춘이 지나면서부터 앞 다투어 연초록의 꽃대를 밀어 올리며 만개해 온 집안에 난향을 가득 채우곤 한다. 미녀들의 각선미처럼 스스럼없이 유선형으로 쭉쭉 뻗은 난 잎은 보기부터 시원스럽다. 얼음조각처럼 뾰족하기는 하나 휘어져 자연스런 운치와 여유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구부러지거나 비틀어짐 없이 바르고 곧을 뿐이다. 다른 식물처럼 곁가지를 치는 일이 없고 오직 꿋꿋함 하나로 고조한 기상을 풍긴다. 끝이 날카로우나 거만함이 없고 땅을 향해 겸손함을 나타낸다. 유선형 아래로 이루는 잎들은 여유의 상징이다. 늘 가지런하고 정연한 자태는 몸단장한 청빈한 선비의 몸가짐과도 같다.
     

    뿌리와 잎은 먹을 것조차 탐하지 않고 영화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어떠한 영양소도 탐하지 않고 오직 섭취하는 것은 벽옥처럼 맑은 물뿐이다. 한 번 뿌리를 적시면 물조차 탐식하지 않는다. 배고픔을 참고 사는 신선 같은 청빈하고 고고한 삶 자체로 연명한다. 손가락 마디처럼 온갖 고통과 시련에도 견딜 수 있는 굳건한 인내와 정신력의 상징이 난초이다. 난초 잎은 영롱한 이슬을 받아먹을 뿐 사시사철 변함이 없고 푸르고 싱싱하다. 뭇나무처럼 웃자라거나 탐욕스럽게 무성하지도 않으며 여느 풀처럼 헤프고 천하게 어우러지는 일 또한 없다.
     

    한편 난초의 극치인 꽃은 어떠한가. 잎들이 사방으로 겹겹이 에워싼 안 촉 속잎에서 연초록빛의 싹이 촛대처럼 솟아 나와 꽃을 피운다. 보기에도 앙증스럽기에 함박꽃처럼 탐스럽지 않으며, 장미처럼 부귀영화를 탐하지도 않은 채 피어오른다. 장미처럼 흑심을 품거나 찬란한 색깔을 뽐내지 않는다. 가시 돋친 천박한 여인의 육체처럼 짙은 향기를 마구 뿜어내는 라일락 같지도 않다. 난 꽃은 작으면서도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비록 꽃은 작으나 은은하게 멀리까지 풍기는 난향은 사대부가의 규수의 멋이다. 꽃은 희되 꽃받침은 연초록이라 고아하고 고상한 자태는 보고 또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은은한 매력이 있어 그 아름다움의 진가를 알아보기에 어렵지 않다. 피기가 어려워 그렇지 한 번 피기 시작한 꽃은 일시적 영화에서 벗어나 달포가 넘도록 꽃을 피우지만 싫증 나지 않는다. 영원의 미를 다소곳이 풍기며 은밀히 유혹한다. 
     

    지조 굳고 검소하며 신의와 절개를 지키면서도 풍월을 즐기던 우리 선조들이 난을 왜 좋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난은 드러난 모습만 고결한 것이 아니다. 일반적인 식물은 환경이 좋지 않으면 여린 잎이 먼저 시들고 죽게 된다. 하지만 난은 병을 제외하고는 묵은 촉부터 차례로 죽는다. 잎이 지고 남은 줄기는 후손을 기르는 영양소가 된다니 자식 사랑에 가슴이 찡하다.
     

    그렇게 드러난 모습이나 본성에 충실한 삶은 여러 가지로 귀감이 된다. 이와 같이 난은 불모지에 생명을 수태해 하나 둘 피어나게 하는 여성을 표상했다. 그리고 동서양을 떠나 난 꽃은 정신적인 순결을 상징할 만큼 기풍이나 품성이 뛰어나다고 말한다.
     

    옛 선비가 그랬듯이 이 계절에 함초롬히 핀 난 꽃을 바라보며 망중한을 즐겨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문득 난향에 취해 화폭에 시화라도 한 번 펼쳐봤으면 하는 꿈을 설핏 가져본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다들 알 것이다. 난을 키우는 것이 여간 많은 정성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고 한다.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줘야 하고, 겨울에는 필요 이상으로 실내 온도를 내려줘야 한다. 이런 정성을 일찍이 부모에게 바쳤더라면 아마 효자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것"이라는 스님의 말처럼 여간한 정성으로는 불가능하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이러저러한 축하할 일이 있을 때마다 으레 난 화분이 전해진다. 아마도 난초가 지닌 고고한 군자의 기품을 잃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며칠 전이었다. 이상한 냄새가 계속해서 풍겨오는 것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냄새지? 하며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한참 만에 확인하게 됐다. 눈에 들어온 냄새의 실체는 다름 아닌 책상 위에 놓인 난향이었다.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몇 년의 세월 동안 덩그러니 놓여있던 난초에 하얀 꽃들이 피어있었다. 주인의 무심함에는 아랑곳없이 자신만의 자태를 맘껏 뽐내며 작은 꽃잎을 활짝 펼치는 그 모습에서 자연의 순리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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